전우용, "민주정치와 토론, 그리고 대통령의 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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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행로(人生行路)’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길을 걷는 것과 비슷하기에 생긴 말입니다. 사람의 평생은 자신과 타인의 수많은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어느 병원에서 낳을지, 어떤 분유를 먹일지, 어떤 학교에 보내고 어떤 특기를 가르칠지 선택합니다.
본인들은 어려서부터 누구와 친하게 지낼지, 어떤 대학에 진학할지, 어떤 전공과 직업을 택할지,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맞을지, 어디에서 결혼식을 치를지, 어느 동네에 집을 마련할지, 어느 회사 주식을 살지 등을 선택합니다.
인생에 닥치는 거의 모든 문제가 ‘선택’을 요구합니다. 인생은 무수한 갈림길을 앞에 두고 선택을 거듭해야 하는 ‘걷기’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길을 택할지 선택하는 기준과 방법도 가지가지입니다. 미리 인생의 계획표를 만들고 그 계획표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늘 "계획대로 되지 않기에 인생" 입니다.
대다수 사람은 예기치 못한 갈림길을 만났을 때 최대한 합리적으로 결정하려고 노력합니다. 목적지의 방향을 가늠하고, 동반자가 있으면 그의 의견을 듣기도 하며, 자기가 걸어온 과정을 분석하기도 합니다. 반면 운수에 맡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속인에게 묻거나, 동전을 던져 보거나, 손바닥에 침을 뱉은 뒤 손뼉을 쳐서 침이 튀는 방향으로 걸어가기도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든 개인의 자유입니다. 자기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지면 됩니다.
국정 운영도 수많은 갈림길을 앞에 두고 선택을 거듭해야 하는 일입니다. 방역 조치를 강화하는 게 나은지 완화하는 게 나은지, 금리를 올리는 게 나은지 내리는 게 나은지, 부동산 관련 규제를 강화하는 게 나은지 완화하는 게 나은지, 원전 의존도를 줄이는 게 나은지 높이는 게 나은지,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주는 게 나은지 일부에게만 주는 게 나은지 등의 정책 문제, 어느 부처 장관으로는 누구를 임명할 것이며, 어느 공공기관장으로는 또 누구를 임명할 것인지 등의 인사 문제, 종전선언을 추진하는 게 나은지 안 하는 게 나은지, 위안부 문제나 징용 노동자 인권 유린 문제와 관련해 일본에 양보하는 게 나은지 안 하는 게 나은지, 사드를 추가 배치하는 게 나은지 안 하는 게 나은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개입하는 게 나은지 안 하는 게 나은지 등의 군사 외교 안보 문제 등 국민의 생활과 안전에 직결 모든 문제가 대통령의 최종 선택과 결정을 기다립니다.
대통령은 매일매일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없는 ‘외로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직책입니다.
대통령 개인과 그 가족에게만 관련된 일이라면, 무속인에게 물어봐 결정하든 동전을 던져 결정하든 손바닥에 침을 뱉어 결정하든 남이 관여할 바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우리 공동체 5천만 명의 삶과 직결" 되어 있습니다.
그의 결정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면, 결코 국민 대다수를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통치자의 납득할 수 없는 결정에 항의하고 저항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 국민의 당연하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입니다. 그렇기에 비합리적이고 설득력 없는 통치자의 결정은 종종 국가 공동체 전체를 극심한 내부 분열과 혼란으로 몰아넣곤 했습니다.
물론, 국가의 진로를 둘러싼 선택을 대통령 혼자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를 둘러싸고 모든 사람이 이해관계에 따라서든 ‘정의감’에 따라서든 자기 주장을 펴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전문가들끼리 토론을 벌이기도 합니다. 민주정치는 본래가 ‘토론의 정치’입니다.
토론이 없으면 어느 주장이 더 나은지 판단할 수 없고, 판단하지 못하면 투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토론할 수 있고, 누구의 주장이 더 정당하고 합리적인지 판단할 수 있는 시민이 없으면 민주정치는 ‘중우(衆愚) 정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대다수 나라들이 왕정(王政) 체제에서 민주정체로 이행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시민 각자가 ‘주권자’의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정치적, 사회적 사안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주권자’입니다.
근래 고등교육이 보편화하고 지식 정보화가 진전됨에 따라, 시민들의 평균적 식견(識見)은 유사 이래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오늘날의 대중은 결코 ‘우중(愚衆)’이 아닙니다. 다만 ‘알려는 의지’는 각자의 이해관계와 직업적 관심에 영향받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파적’ 또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지에 의해 축적된 ‘앎’ 역시 그렇습니다.
알고 싶은 것만 알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습성입니다. 자기 것과 다른 ‘앎’에 상시적으로 노출되는 지식인/전문가조차 ‘앎의 당파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데, 그럴 의무가 없는 사람이야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
그런 걸 알아서 뭐 하려고?” 만큼 지식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말도 없습니다. 대다수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참 지식’이고, 이해관계와 무관한 지식은 ‘쓸데없는 지식’이며, 손해를 끼치는 지식은 ‘가짜 지식’으로 취급합니다.
토론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보들만 긁어모아 자기들만의 ‘지식세계’를 구축하고, 그를 ‘신념화’한 사람들이 자기 지식의 ‘상대성’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토론은 자기의 앎과, 다른 사람의 앎을 비교 검토하면서 자기 ‘앎’을 교정(校正)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교정이 거듭되면서 서로 다른 ‘앎’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양보와 타협이 이루어지고, 더 나은 관행과 문화가 만들어지며, 사회가 진보합니다. 이것이 민주정치 최대의 장점입니다.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의 주요 책무 중 하나는 사회 전체에 토론의 안건을 제시하고, 토론을 조직, 주재하며, 사회적 토론을 통해 도출된 결과를 정책으로 만들어 추진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토론을 주재, 관리하기 위해서는 사회 각 분야의 주요 의제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대통령 주변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대통령이 전혀 모르는 분야가 있으면, 개인적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기꾼에게 속기 쉽습니다. 예컨대 대통령이 원전의 안전성과 경제성 논쟁의 쟁점을 모른다면,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주장만을 믿고 따르는 위험천만한 일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합리적 판단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종종 주술(呪術)에 의존합니다. 목적지를 알고 지도(地圖)를 숙지한 사람은 갈림길 앞에서 동전을 던지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무식한 사람이 주술에 의존하고, 주술에 의존하는 사람이 무식한 이유입니다.
주술에 의존한 통치자가 나라를 망친 사례는 무척 많습니다. 어떤 통치자가 사람들끼리의 토론을 무시하고 귀신과 주술에 의존한 것은, 합리적 판단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선 후보들 사이의 ‘법정 TV 토론’이 시작되자, 토론이 무의미하다거나 표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등의 언론 보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간에는 ‘토론 능력과 대통령 직무 수행 능력은 별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실 누구든 대통령이 된 뒤에는 토론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대통령에게 그럴 의지가 있어도, 그럴 상대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토론을 못 하거나 기피하는 사람은 결코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남의 주장에서 사리에 맞지 않는 점을 찾아 공박하는 것이 ‘토(討)’이고, 사리에 맞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이 ‘론(論)’입니다.
어떤 주장이 사리에 맞는지 판단할 수 없는 사람, 사리에 맞는 얘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한 사람은 토론을 못 할뿐더러, 토론 끝에 나온 결론을 이해하지도 못 합니다. 토론을 못 하는 사람은 토론의 중요성도 모르며, 토론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힘과 주술에 의존합니다.
바둑을 못 두는 사람이 바둑의 승부를 판단할 수 없고, 피겨 스케이팅의 룰을 모르는 사람이 피겨 스케이팅 심판이 될 수 없습니다. 민주국가의 대통령은 사회적 토론을 주재하고, 토론을 통해 도출된 합리적 결론을 존중해야 하는 직책입니다. 민주정치가 자체로 ‘토론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민주국가 대통령에게 필요한 첫 번째 자질은 ‘사회적 토론’을 주재하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도 토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최고 권력자’는 국민입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 능력과 자질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더 나은 대통령을 뽑을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나아갈 길은 주술이 아니라 토론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앞으로 남은 TV 토론도 객관적 심판의 관점으로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합리적 토론으로 발전하는 나라를 만들려면 어떤 후보를 택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의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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