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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주년」광복절 맞아 박창신, 안필립선생등 247명 독립유공자 포상 2편 (세부문건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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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아 1919년 충남 천안에서 광부들의 만세시위를 이끈 박창신 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남으로 미국에서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앞장선 안필립 선생 등 247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65명(애국장 12, 애족장 53), 건국포장 30명, 대통령표창 152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고, 여성은 14명이다. 건국훈장.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코로나19 상황에 맞춰 제76주년 광복절 계기로 유족에게 수여된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분은 1949년 최초 포상 이래 건국훈장 11,465명, 건국포장 1,422명, 대통령표창 4,045명 등 총 16,932명(여성 540명)에 이른다.

 

고(故) 박창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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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5일 충남 천안군 직산(稷山) 금광회사의 고용인으로 동료들을 설득해 만세시위 계획을 수립, 같은 달 28일 오전 금광 갱부들의 교대시간에 광부 등 약 200여명을 이끌고 천안 입장(笠場)시장까지 시위행진을 하다 징역 1년 6월 받음

 

- 1919년 당시 국내 최대 금광 중 하나인 직산금광에서 광부들이 주도한 만세시위
- 3.1운동이 종교인, 지식인뿐만 아니라 광부, 기생, 백정 등 전 계층이 참여한 거족적 민족운동이었음을 보여줌
- 당시 일본 군경의 발포로 3명이 체포되고, 부상자 6명이 발생(이 가운데 중상자는 3명)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9. 6. 25). 박창신 선생이 1919년 5월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천안군 직산 금광회사의 광부들이 박창신 선생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진행했다고 보도하였다.

 

피고 : 박창신(朴昌信, 11월 15일생, 현재 25세), 금광 고용인
본적 : 평북 창성군 동창면 대유리
주소 : 충남 천안군 입장면 기로리
주문 : 보안법 위반, 징역 1년 6월(공소 기각)
 

피고는 1919년 3월 1일 이후 조선 내 각지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라 소리 높여 부르며 조선독립 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고 그 취지에 찬동하여 이에 같은 행동을 할 것을 계획하여 동년(1919년) 3월 25일 위 주소지 기로리의 자신의 집에서 직산(稷山) 금광회사의 고용인인 원심 피고 안은(安銀), 한근수(韓根守) 및 외 여러 명에게 조선독립의 시위운동을 해서 독립의 실행을 실현하자고 권유하여 선동하고 그 다음날 27일 위 안은, 한근수 등과 함께 위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 여러 개를 만들어 다음 날 28일 위 직산금강회사 갱부의 교대시각을 기하여 광부 등을 선동하여 무리를 만들어 천안군 입장(笠場)시장으로 밀고 들어갈 것을 약속하고 또 자기 집에서 원심 피고 백학서(白學西)에게 권유하여 위 거사에 가입시키고 다음날인 28일 오전 6시 30분경 동 광산의 갱구에 도착하여 교대하는 광부에게 독립시위운동을 하자고 선동하여 약 200명의 갱부와 함께 대오를 이루어 조선독립운동 방법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위 입장시장으로 향하는 도중 양대리까지 행진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였다. (중략) 판시 보안법을 적용하여 피고를 징역 1년 6월에 처한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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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복심법원, 1919. 6. 25). 박창신 선생이 1919년 5월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음

 

「신분장지문원지」. 박창신 선생이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20년 6월 4일 출옥했음을 보여준다.  

 

성명 : 박창신(朴昌信) 1897. 11. 5. 출생, 광부
본적 : 평북 창성군 동창면 대유리
생지 : 평남 평양부 염점리
주소 : 충남 천안군 입장면 기로리
판결언도연월일 : 1919. 5. 9.
형의 시기 : 1919. 9. 4.
언도관서 : 공주지방법원
죄명 : 보안법 위반
형명형기 : 징역 1년 6월(1920년 징역 9월로 감형)
집행관서 : 공주감옥
출옥년월일 : 1920.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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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신 선생이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20년 6월 4일 출옥

 

소요사건에 관한 도장관보고철충청남도 도장관(지금의 도지사)이 내무부 장관에 올린 보고서이다. 직산금광의 광부 150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켰고, 일본 군경의 진압으로 시위 참가자 6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하였다.

 

조선인 소요에 관한 건(충청남도장관, 1919. 3. 28)
오늘(1919. 3. 28) 오전 7시 반 천안군 양대(良垈)헌병주재소에 직산금광(稷山金鑛) 갱부 약 150명이 몰려와 폭동을 일으킴에 따라 발포 해산시켰는데 그 결과 폭동 참가자 3명을 체포하고 6명이 부상을 입고 그 중 3명은 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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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도장관(지금의 도지사)이 내무부 장관에 올린 보고서

 

고(故) 정대홍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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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월경 충남 예산군에서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태 60도 받음
- 전근대적, 비인격적 형벌인 태형 처분을 받고 매우 젊은 나이(30세)에 사망
-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구호와 달리 일본의 조선 통치가 강제적 식민정책과 잔인한 형벌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줌
-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 개선(2018)에 따라 포상
- 동일 지역(충남 예산), 동일 활동으로 30분이 이번에 포상(대통령표창)

정대홍 선생의 「범죄인명부」와 「제적부」. 정대홍 선생이 출옥한지 1년 2개월 만인 1922년 8월에 사망했음을 보여준다.


- 본명 : 정대홍(丁大洪, 현재 27세), 농업
본적ㆍ주소 : 충남 예산군 응봉면 주령리
- 죄명 : 보안법 위반
- 형명형기 : 태 60
- 판결 또는 즉결 : 1919. 4. 1.
- 판결 또는 즉결청명 : 예산헌병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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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홍 선생이 출옥한지 1년 2개월 만인 1922년 8월에 사망

 

고(故) 이종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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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3월 전북 고창에서 태극 문양과 ‘대한독립’이라는 문구를 쓴 깃발을 만들고, 성내면사무소 앞에 세워두었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받음
- 3.1운동의 열기가 1919년에 그치지 않고 1920년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계속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사례
- 3.1운동 1주년을 앞두고 일본 군경의 경계가 삼엄하던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제작하여 게양하는 대범함을 보임. 선생은 6.25전쟁 당시 전사함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21. 1. 15). 이종철 선생이 1920년 3월 10일 밤 동료들과 태극 문양과 ‘대한 독립’이라고 쓴 종이 깃발을 만들어 성내면사무소 건물 내 공터에 세웠음을 보여준다.
- 피고 : 이종철(21세), 농업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 주문 : 보안법 위반, 징역 1년
피고 등 4명은 1920년 3월 10일 밤 이종수(李鍾株)의 집에서 한국 독립의 기세를 돋우어 세인을 동요하려는 방법으로써 태극기를 본뜬 종이 깃발을 만들어 군중이 보기 쉬운 장소에 걸기로 계획하였다. 이날 밤 이종수의 집에서 태극기 문장인 태극 문양 및 대한독립 또는 독립이라는 문자를 적은 대형, 소형 종이 깃발 12개를 만들었다. (중략)
피고 등은 그날 밤 이를 성내면사무소 건물 내로 가지고 가서 그 건물 내의 공터에 세워 놓음으로써 안녕 질서를 방해하였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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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보안법 위반, 징역 1년 판결문

 

「형사공소사건부」. 이종철 선생이 1심 재판에서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 성명 : 이종철(21세), 농업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성월면 월산리
- 구류 : 1920. 3. 26.
- 죄명 :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 제1심
재판소 : 전주지방법원
판결월일 : 1920. 1. 15.
판결요지 : 징역 1년
- 제2심
공소신청월일 : 1921. 1. 17.
공소신청인 : 피고
공판송치 : 1921. 1. 18.
종국월일 : 1921. 1. 21.
종국요지 : 취하
- 재판확정 : 1921.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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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선생이 1심 재판에서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음


이종철 선생의 「제적부」. 이종철 선생이 1900년 10월 25일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469번지에서 출생하고, 6.25전쟁 기간인 1950년 10월 29일 ‘전사’했음을 보여준다.
전라북도 고창군 성월면 월산리 469번지에서 출생
1950년 10월 29일 □□지구에서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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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선생 제적부, 6.25전쟁 기간인 1950년 10월 29일 ‘전사’


고(故) 최심 선생(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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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 전남 광주에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여 퇴학 처분받음.

- 전국적인 학생독립운동인 광주학생운동에 여학생들도 적극 가담했음을 보여주는 사례

-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는 일본인 중학교 학생들로부터 ‘댕기머리 잡아당김’의 수모를 당했던 학생이 재학 중이던 학교임
- 같은 학교, 같은 활동으로 8분이 이번에 포상(대통령표창)

 

조선일보(1930. 1. 20)
광주여고보생 다수 퇴학처분, 40여 명을 퇴학 처분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금번 사건의 관계자라 지목하는 학생들에게 대하여 지난 16일과 17일에 전후 40여 명의 퇴학 처분을 단행하였다는데 혹은 부형을 초청하여 자퇴원을 제출하라고 권한 바도 있었다는데 주요한 학생의 성명은 다음과 같더라.
▸16일 처분자 閔順禮, 柳寅順, 崔豊五, 丁任淑, 曺貞愛, 朴鳳梅, 李玉, 薛貞順,
曺乙梅 外 6名
▸17일 처분자 崔心, 全義英 外 20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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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0. 1. 20). 최심 선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관계하여 1930년 1월 17일 퇴학 처분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학적부」(전남여고=옛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최심 선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30년 2월 19일 ‘가사’ 사정으로 퇴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일보(1930. 1. 20) 기사에 따르면, 퇴학 사유는 ‘가사’가 아니라 광주학생운동 참가 사실이었다.

ㅇ 학적부(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 성명 : 최심(1914. 9. 7. 출생)
원적 : 전남 광주군 광주면 누문리 60
- 입학 : 1927. 10. 6, 제1학년에 입학
- 퇴(전)학 : 1930. 2. 19, 가사 사정으로 퇴학
- 입학 전 이력 : 광주 제2공립보통학교, 제6학년 졸업(48인 중 43번)
- 상벌 : 무기정학(1929. 11. 17), 자택근신 3일간(1930.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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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심 선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30년 2월 19일 가사’ 사정으로 퇴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하지만조선일보(1930. 1. 20) 기사에 따르면퇴학 사유는 가사가 아니라 광주학생운동 참가 사실이었다.


고(故) 이효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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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11월경 강원도 춘천군 춘천공립농업학교 3학년 재학 중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받음
- 단순히 농업학교 학생들의 활동에 그치지 않고 종국적으로 조선의 인구 중 80%를 차지하는 농민층에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활동
- 같은 활동에 참여한 박찬하 선생 등 4분도 이번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42. 10. 21). 이효선(이전효선) 선생이 춘천공립농업학교 재학 중 민족주의 사상을 품고 학생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하여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조선독립을 목표로 활동하였음을 보여준다.

피고 : 이전효선(이준환, 현재 24세), 무직(원래 소학교 훈도)
본적 : 강원도 김화군 창도면 창도리 326번지
주소 :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정리
주문 : 치안유지법 위반,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200일 본형 산입)

 

피고인 이전효선은 (중략) 민족주의 사상을 품고 조선을 일본제국의 기반에서 이탈, 독립시킬 것을 희망하기에 이르렀던 자로, (중략)

제1. 피고인 이전효선은 조선의 독립을 실현할 목적으로

(1) 1937년 12월 하순 (중략) 양산재만(陽山在萬)에게 ‘조선 민족은 일치단결하여 조선의 독립을 도모해야 하며 이를 위해 먼저 청년 자녀에 대해 조선민족이라는 자각을 촉구할 필요가 있는데 현재는 거의 유명무실하다’고 하며 (중략) 엡윗 청년회를 부흥시켜 (중략) 그 회원에 대해 점차 민족의식을 주입시켜 장래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자고 제의해 동인의 찬동을 얻었다. (중략)
(2) 1937년 11월경 동급생 중 독서에 취미를 가진 자를 물색하여 독서회를 조직하고 (중략) 피고인 이전효선은 위 회원 등에 대해 (중략) “우리는 농민을 계몽시켜 농촌의 진흥을 도모하는 것은 결국 조선의 민도(民度)를 높여 조선민족이란 자각을 촉진시켜 타민족 지배의 배제를 도모해야만 한다. 이로써 우리는 그 목적을 향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명했다. (중략)
(4) 1939년 1월 하순 (중략) 피고인 이전효선이 졸업한 뒤의 독서회의 방침에 관하여 (중략)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때 피고인 이전효선은 회는 해산하더라도 각자는 앞으로 민족주의자의 저서를 읽고 민족의식의 함양에 힘써 조선민족 해방이라는 목적을 향해 매진해 달라고 말함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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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 치안유지법 위반,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200일 본형 산입)


「신분장지문원지」. 이효선 선생이 1942년 10월 21일 재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44년 4월 4일 출옥하였음을 보여준다.


성명 : 이전효선(1919. 1. 12. 생), 본래 성명 : 이효선, 이명 : 이준환
본적ㆍ생지 : 강원도 김화군 창도면 창도리 326
주소 : 경북 문경군 마성면 정리
판결언도년월일 : 1942. 10. 21.
형의 시작 : 1942. 10. 21.
죄명 : 치안유지법 위반
형명형기 : 징역 2년(미결구류 200일 통산)
집행관서 : 서대문형무소
출옥년월일 : 1944.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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