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출입 28년, 전 동아일보 기자가 본 '조국의 시간'-살아있는 권력 수사는 대국민 사기극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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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실토해야 할 때다. 살아있는 권력 수사는 대국민 사기극이었음을.
검찰은 일단 명분 싸움에서 졌다. 이제 유무죄는 부차적인 문제가 돼 버렸다.
"이제 실토해야 할 때다. 살아있는 권력 수사는 대국민 사기극이었음을."
재판도 안 끝난 상황에서 이런 책을 내는 게 부적절하지 않으냐는 비판은 일단 접어두고 말하고자 한다. 차라리 신화 속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표현하는 게 낫겠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도 포세이돈에게 미움을 받아 모진 고통을 겪은 오디세우스가 이보다 더했을까? 오디세우스는 10년 만에 귀향해 아내 페넬로페를 괴롭히던 악당들에게 복수라도 했지.
아니면, <니벨룽의 노래> 1부의 주인공 지크프리트와 비교하는 게 나을까? 네덜란드의 용맹한 왕자 지크프리트는 부르군트 왕국에서 외침을 막아내며 큰 공을 세웠으나 그를 시기한 부르군트의 간웅 하겐에게 암살된다.
하겐은 사냥에 열중하던 지크프리트의 등 뒤로 접근해 창을 꽂는다. 지크프리트는 용의 피에 몸을 담근 덕에 천하무적이었으나, 이파리가 붙는 바람에 피가 닿지 않은 어깨 부근이 유일한 약점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약점을 하겐에게 알려준 사람은 지크프리트의 아내 크림힐트였다. 뒤늦게 속은 것을 알게 된 크림힐트는 2부에서 그야말로 피비린내 진동하는 복수혈전을 펼친다.
어제 해 질 무렵 <조국의 시간>의 마지막 장을 덮고 산에 올랐다. 숲이 뿜어내는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었다. 뭉크의 <절규>가 이보다 더할까?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이보다 잔인할까?
딸, 아들, 부인 등 가족에 이어 이혼한 동생 부부, 심지어 사망한 부친까지 단두대에 서야 했다. 다들 삼족을 멸해야 마땅한 대역죄인처럼 단죄당하고 발가벗겨지고 짓밟혔다. 당사자는 장관 된 지 한 달 만에 불명예스럽게 물러나야 했고, 그 부인은 지금도 차가운 감옥에서 피눈물을 쏟고 있다.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아직도 조국이냐고. 지겹지 않으냐고. 또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조국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고. 후자를 택한다면,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진실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다. 검찰개혁 완성에 대한 소망 때문이다.
검찰 권력을 해체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후퇴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검찰공화국 대선후보가 국민적 인기를 누리는 건 부조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조국의 ‘비리’와 검찰개혁은 별개지만, 조국 사태 혹은 윤석열 사태와 검찰개혁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조국 사건은 겉으로는 검찰 승리인 듯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검찰 패배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1년여에 걸친 수사과정과 재판과정을 통해 눈 밝은 국민은 조국 수사가 얼마나 억지스러운지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게 됐다. 수사가 아닌 사냥이었기 때문이다.
기자로서 오랜 기간 검찰 수사를 취재해온 내가 보기에도 수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렇게 탈탈 털어 온갖 것 끌어 모으는 건 수사가 아니다. 우표 수집할 때도 원칙이 있다. 취할 게 있고 버릴 게 있다. 하물며 사람을 단죄하는 일이랴. 수사는 명분이 뚜렷하고 과정이 공정하고 결과물이 산뜻해야 한다.
진영을 떠나 공감을 얻어야 한다. 조국 수사팀은 ‘소신 검사’ 심재륜의 수사 10결을 되새겨야 마땅하다. 윤석열과 한동훈은 그들의 선배인 특수통 안대희와는 다른 길을 걷기로 작정했던 걸까. 불법대선자금 수사로 ‘국민검사’ 칭호를 얻은 안대희도 윤석열 못지않은 검찰주의자이고 나중에 전관예우 문제로 스타일을 구겼지만, 적어도 수사에서만큼은 절제와 균형을 갖추려 애쓴 검사로 기억된다.
이제 실토해야 할 때다. 살아있는 권력 수사는 대국민 사기극이었음을.
많이 양보해서 말해도, 개인비리일 뿐이다. 여느 특목고 학부모처럼 자녀 대학/대학원 입시 때 편법 좀 쓰고, 여느 강남 사모님처럼 돈 좀 굴려보겠다고 펀드에 손댔다가 손해만 보고 공직자인 남편에게 해만 끼친 사례다.
굳이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꼽자면 이후 전개된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수사 정도인데, 이 사건 재판은 증거보다 주장과 추론이 넘치는 특이한 공소장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지 않다.
내가 자주 언급하는 균형 논리로 검찰과 조국을 10회 비판한다면, 중립에 따른 양비론을 펴더라도 검찰 8회, 조국 2회가 적당하다. 그래야 비례와 균형이 맞는다. 8회는 조잡하고 야만적인 수사방식과 초라한 수사결과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꽉 찬다. 거기에 수사권/기소권 독점에 따른 검찰 권력의 폐해와 검찰패밀리 커넥션, 제 식구 감싸기, 강고한 조직이기주의까지 덧붙이면 그 두 배로 비판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검찰은 일단 명분 싸움에서 졌다. 이제 유무죄는 부차적인 문제가 돼 버렸다. 도덕적 심판과 사법적 판결과 별개로 정치적으로는 무죄를 인정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민 정서상 사법적 진실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검찰이 그나마 체면을 회복할 길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해 7월 펴낸 저서를 통해 일부 유죄, 일부 무죄를 주장했다. 워낙 많은 범죄 혐의를 갖다 붙여 놓아서 어느 정도 유죄가 불가피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가짓수만 많지, 비슷비슷한 혐의를 잔뜩 끌어 모은 검찰 수사는 진실게임이 아니라 확률게임이었다.
차 떼고 포 떼면 남는 것은 사모펀드와 표창장이다. 무슨 인턴/체험활동이니 봉사활동이니 장학금이니 하는 이야기는 서로 민망하니 하지 말자.
대한민국 특수부 검사 수십 명이 몇 달간 달라붙어 100회 안팎의 압수수색으로 일군 성과물이라고 떠들면 검찰 직접수사가 낯설기만 한 사법선진국 국민이 웃지 않을까 싶어서다. 설사 권력형 비리라고 해도 결과물이 부실하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보편적 잠재적 비리에 대해 특정인 것만 파헤친 표적수사라는 점이 너무나 선명하고 증거도 억지스럽고 빈약하기에 자꾸 이런 걸로 공격하면 ‘없어’ 보인다. 입학사정관제 초기 논문대필 등 온갖 편법이 허용되고 지금도 자소서 비리 등이 판치는 입시현실을 감안할 때 세월이 지난 뒤 뒤늦게 교육당국도 아닌 수사기관이 나서서 특정인 입학 자료만 문제 삼아 재판에 넘긴 건 불공정의 극치였다.
그런 점에서 나는 촛불 든 대학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수사가 공정 가치를 일깨우게 했다는 데 온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비록 관행적인 입시비리에 경종을 울린 공은 인정하더라도.
검찰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조국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은 수사 의도와 수사방식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공소장 내용, 특히 사모펀드와 표창장 관련 혐의가 대체로 사실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믿음은 불안하고 위태롭다. 사실과 허상과 과장이 교묘하게 뒤섞였기 때문이다. 곁가지가 본질을 가렸기 때문이다.
먼저 사모펀드. 사냥이 시작될 무렵 윤석열 총장이 수사 명분으로 여러 사람에게 강조했다는 이 혐의에 대해 정경심 교수는 사실상 무죄를 선고받았다. 공모의 핵심인 횡령 혐의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고위공직자 부인으로서 불법 사모펀드를 실질적으로 운용했다는 비리 의혹이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유죄가 인정된 차명 주식투자 등은 그야말로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먼지떨이 수사의 부산물에 굳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거다. 그런데 ‘펀드 무죄’는 언론이 그 의미를 축소해서 그렇지, 지난해 6월 조 전 장관의 조카 조범동 씨 재판에서 이미 판가름 난 거나 마찬가지다.
당시 재판부는 두 사람의 공모를 인정하지 않은 채 “권력형 범죄의 근거가 없다”라고 명확히 판시했다. 실상이 이런데도 사람들이 유죄가 인정된 자잘한 혐의에 주목해 조국 부부에게 새겨진 주홍글씨를 좀처럼 지우려 하지 않는 것은 애초의 강렬한 단죄의식을 이제 와 버리는 게 찜찜하기 때문이다. 비난의 근거가 오판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기도 싫고. 합리적인 듯하면서도 불합리하고, 공정한 듯하면서도 불공정한 태도다.
어느 정도 의심이 해소된 펀드와 달리 표창장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많은 사람이 검찰을 비난하면서도 조국을 옹호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표창장 위조 혐의는 때마침 상영된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과 오버랩 되면서 조국 부부에게 파렴치범이라는 이미지를 씌우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런데 유무죄를 떠나 검찰이 정경심 교수를 부실한 수사내용으로 일단 기소한 다음 재판이 시작된 후 범죄일시와 범죄방식을 완전히 바꾼 새 공소장을 제출해 이중기소라는 희대의 편법을 저지른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이미 검찰 수사는 신뢰를 잃었다.
게다가 1심 재판부의 유죄 판결 이후 검찰이 컴퓨터 접속기록, IP 등과 관련한 유죄증거를 조작했다는 논란이 일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또한 불법으로 증거를 수집한 게 인정되면 실체적 진실과 관계없이 무죄가 선고될 수도 있다.
만약 2심에서 표창장이 뒤집힌다면 나머지 자잘한 혐의가 다 유죄로 인정돼도 역사는 이를 검찰의 판정패, 어쩌면 완패로 기록할 것이다. 다만 아직은 어느 한쪽으로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조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표창장과 관련해 SBS의 ‘강사휴게실 PC’ 보도 배경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검찰이 PC를 확보하기도 전에 관련 정보를 SBS에 알려준 사람이 조국 수사의 숨은 조력자일지 모른다는 의심이다.
“재판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므로 상세한 언급은 삼가겠다”(조국의 시간 24p)라는 문장으로 짐작하건대 그로서도 표창장은 매우 곤혹스럽고 민감한 문제로 보인다. 또한 “법학자로서, 전직 법무부 장관으로서 기소된 혐의에 대해 최종 판결이 나면 승복할 것이다”(88p)라고 쓴 걸 보면 원칙론이겠지만 제기된 혐의에 대해 어느 정도 유죄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건 내 의견이기도 하다. 그렇긴 해도 이 비극적 사태의 ‘진실’이 바뀐다고 보지는 않지만.
책 내용 중 비화를 꼽자면, 먼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을 검찰총장으로 임명할 때 청와대 안팎에서 찬반 의견이 갈리고, 민주당 법사위원들을 비롯한 당 안팎 법률가들이 대부분 강하게 우려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348p).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가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주장한 한동훈 인사 관련 의혹에 대해 ‘확인사살’하는 장면도 흥미롭다. 최 대표에 따르면, 윤석열은 총장이 된 후 한동훈(당시 서울중앙지검 3차장)을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 전 장관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 “단호히 거절했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한 검사의 경력이나 나이가 서울중앙지검장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더 중요하게는 서울중앙지검장을 검찰총장 최측근으로 임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라고 밝혔다(350p). 본문 마지막에 소개된 이 일화를 접하며 섬뜩함을 느낀 사람이 나뿐일까?
그렇다고 책 내용이 다 비장하지는 않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는 잠시 웃고 넘어가도 되겠다. 2019년 9월 2일 국회 기자간담회에서 오간 대화다.
기자: 위장전입 관련해, 영국에 살았는데 왜 전입이 부산으로 되어 있습니까? 거짓말 한 거 아닙니까?
나: 영국에 부인과 딸이 유학 중이었고, 주민등록법상 주소를 영국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기자: 왜요?
그때 못한 반문을 지금 하겠다. “기자는 영국으로 유학 가면 한국 주민등록상 주소를 영국으로 바꿀 수 있습니까?”(59~60p)
비극적 서사인 이 책은 조국 지지자들보다 비판자들이 읽으면 더 좋을 듯싶다. 그래서 균형 잡힌 논쟁을 통해 소모적인 갈등과 불필요한 감정 대립이 줄면 좋겠다. 조국으로 갈라진 사회, 조국으로 화합할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얼마든지 접점이 있다. 비판도 좋고 단죄도 좋지만, 잘못한 만큼만 그렇게 하자. 조국 지지자가 아닌, 검찰개혁 지지자의 소박한 바람이다.
글쓴이: 조성식 전 동아일보 신동아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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