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이후의 미국: 블루칼라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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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미국인들처럼, 나 또한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었다. 먼저, 투자자로써 나의 3월은 지옥 같았다. 그동안 주식을 하면서, 돈을 벌 수도 있지만 잃을 수도 있단 것은 알았다. 아니,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었다. 큰돈을 잃을 때도 있었지만, 다시 벌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손실을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3월에, 나는 절망했다. 그동안 투자를 야바위 게임쯤으로 생각했다. 동전을 뒤집어서 앞면이 나오면 돈을 벌고, 뒷면이 나오면 돈을 잃는, 확률을 가장한 놀음. 잃을 때도 있지만, 돈을 벌 때 가 더 많았다. 나는 계속해서 돈을 걸었다. 그런데, 이번 3월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뒷면이 나왔다. 뒷면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나올 수 있을지는 몰랐다. 내가 하고 있는 투자라는 게임에 대한 믿음 자체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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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지나자, 마법처럼 다시 앞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확진자와 사망자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주식시장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내가 샀던 종목은 운 좋게도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5월이 되자 주식잔고는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금융시장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사이, 미국에서의 일상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사재기가 극심했던 3월에는, 휴지나 식료품조차 사기가 어려웠었다. 세계 최고의 농업 생산국에서 먹을 걱정을 해야 될 줄은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도 농산물의 산지가격은 떨어졌다. 문제는 육류였다. 가공하고 유통하는 공급망이 코로나로 붕괴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중 마트 매대가 비어갔던 것이다. 지금은 다행히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코로나 이전보다 식료품의 종류는 약간 줄고, 값은 약간은 올랐지만, 당장 고기나 휴지를 못 살 정도는 아니다.
직장인으로서의 나의 삶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 벌써 세 달이 지났고, 앞으로 적어도 세 달은 출근할 일이 없어 보인다. 연말 예정되었던 보너스가 취소되었고, 기존 팀원들이 코로나 관련 프로젝트에 차출되는 바람에 내 업무량은 조금 늘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월급 나오는 직장이 있단 것 자체가 고마울 따름이다. 불평할 수는 없다. 다행히 내가 하는 일은 재택근무 적용이 생각보다 쉬웠고, 적응이 된 이후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가 돌아갔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사무실에 복귀하는 시간은 점점 미뤄지는 것이리라.
가장으로서 나는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평소 같음 사무실에서 딴짓을 하고 있을 월급루팡 타임이, 아이랑 짬을 내서 노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콘퍼런스 콜 도중 직장동료 혹은 고객의 자녀 목소리가 들릴 때가 많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상황인 듯하다.
코로나는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바뀌어 놓었다. 외출을 못해 답답하고,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제한되어 불편하다. 하지만, 불편할 뿐이다. 삶이 망가지진 않았다. 정말로 코로나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분들에게 나의 불편함은 같잖은 푸념일 뿐이다.
아메리칸드림의 앞면, 보이는 것들
유학을 온 이후 미국에 정착한 나에겐, 중국인 장인 장모님이 있다. 두 분은 2000년도 초반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당시 중학생이던 아내는 친척 집에 맡겨두고, 두 분만 먼저 왔다. 돈을 벌기 위해였다.
늦은 나이에 별다른 기술도 없이 온 이민이었다. 두 분은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영어를 그래도 빨리 익힌 장모님은 서빙 일을 했고, 장인어른은 같은 식당에서 배달 일을 했다. 두 분은 그 뒤로도 계속 식당 일을 해오셨다. 두 분의 영어는 그래서 지금도 지나치리라만치 ‘공손’하다.
내세울 것이 근면함밖에 없던 두 이민자는 열심히 일했다. 휴일도 없이, 하루 13시간씩을 밖에서 일했다. 일터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견뎠다. 호소할 데도 없었다. 나이 많은 이민자가 차이나타운을 벗어나서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간에 몇 번 식당을 옮기시긴 했지만, 두 분은 20년 가까이 식당 일을 했다.
두 분의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영주권을 취득했고, 집도 한 채 장만했다. 신분이 안정된 덕에, 중국에 남겨둔 딸 또한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온 내 아내는, 커뮤니티컬리지를 거쳐 번듯한 주립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아내는 지금은 두 분의 연간 소득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연봉을 받는다.
아메리칸드림의 뒷면, 보이지 않는 것들
아메리칸드림. 내 장인 장모님의 삶 그 자체다. 아무런 기술 없이도, 미국에선 누구나 열심히 일한다면 번듯한 삶을 살 수 있다. 반은 맞는 말이다. 맨몸으로 미국에 와서 집도 사고, 딸을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빠진 게 있다. ‘개같이 열심히 일하고 안 써야 된다’는 전제.
두 분은 거의 20년간 매주 90시간이 넘게 일했다. 노동력을 갈아 넣어서, 임금을 늘린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벌은 돈은 악착같이 저축했다. 하루 13시간씩 식당 일을 하고 돌아와, 다음날 도시락까지 쌌다. 아내의 가족이 미국에서 이렇게 터전을 닦을 수 있었던 데에는, 한 세대의 이런 고생과 희생이 있었다.
물론 장인 장모님이 잘 풀린 케이스인 건 맞다. 식당이 잘 될 때, 장모님은 한 달에 5000불 이상을 벌었다.(최고 기록은 월 8천 불). 식당 임금 자체는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팁이 짭잘했다. 장모님은 꽤 요령이 있는 웨이트리스셨던 것 같다. 식당 또한 유명인이 많을 찾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됐기에, 팁도 후하게 받을 수 있었다.
내 장모님처럼,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거나 약간의 기술을 체득할 경우 괜찮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 확실히 미국은 저숙련 블루칼라 노동자도 고임금을 받아 갈 수 있는 곳이다. 대도시의 경우, 서비스직도 시간당 15불 정도 버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이 정도 임금에 1) 노동시간을 정말 갈아 넣고, 2) 비용을 극단적으로 줄일 경우, 어느 정도 저축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미국 임금은 저숙련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유입되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미국으로 건너 간 한인들이 주로 세탁소 나 편의점을 운영한다는 말,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요샌 베이글샵을 운영하는 분들도 많아졌다. 중국 사람들의 주요 사업은 단연 중식당이다. 이들 업종 특성은, 별다른 기술이 없고 영어가 익숙지 않은 이민자들도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내준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더 오래 일하는 자에겐, 소득으로 확실히 되돌아온다. 그들이 이민자든 외계인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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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미 공장의 해외 이전으로, 많은 제조업 일자리가 미국에서 사라졌다. 또한, AI 기술 도입으로 단순 사무직 자리도 계속 줄고 있다. 기술과 사회의 발전이, 이미 평범한 미국인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고 있다. 다만, 주류 언론에서 이들의 삶에 관심이 없을 뿐.
이처럼 경쟁에서 밀려난 노동자들이 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업종은 서비스업이다. 아직 인공지능과 해외 이전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민자들의 일터였던 서비스업에 다른 경쟁자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이들은 대립할 수밖에 없다.
경제가 좋았던 지난 몇 년 동안, 헤어드레서, 바텐더, 식당 서빙, 우버운전사 등의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졌다. 덕분에 미국 실업률은 역대급으로 낮아졌다. 오랫동안 지체되었던 실질임금도, 가장 최근 몇 년 동안은 오르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삶도 나아지는 것만 같았다.
미국의 높은 인건비를 논할 때 주로 언급되는 것은, 이 서비스직 노동자에 대한 임금이다. 특히 배관이나 전기처럼 어느 정도 기술이 요구되는 직업들의 몸값은 매우 비싸다(그래서 미국에서 집을 사면 DIY 기술이 는다). 상대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저소득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월급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교사는 대표적인 박봉 직업이다. 막중한 역할과 책임에 비례하지 않는 월급에 좌절해서, 일을 그만두는 젊은 교사가 부지기수다. 지인 중 한 명은 교직을 때려치우고 공사판으로 옮겨갔다. 당연히 돈은 더 많이 번다.
IT, 금융업 의사 같은 고소득 화이트칼라에 가려져있는 저소득 화이트칼라의 임금은 계속해서 줄고 있다. 화이트칼라 저소득층과 블루칼라 직종 고소득층 간에는 소득 차이가 거의 없거나 역전돼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을 서비스직으로 내미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던 와중에, 코로나가 덮친 것이다.
코로나의 파괴는 차별적이다
식당, 쇼핑몰, 미용샵, 호텔, 관광지가 코로나 사태로 인해 모두 문을 닫았다. 서비스업종 노동자들의 일터가 모두 폐쇄된 것이다. 많은 기업들이 타격을 입었지만, 큰 기업일수록 재택근무에 잘 적응할 여력이 있다. 대기업들이 재택근무로 전환하는 동안,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영업자, 소매점들은 점점 파괴되고 있다. 직장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폐업 사인이 붙은 단골가게들이 늘어나고 있다. 직장인들이 집에서 일하니 별 수가 없다.
이민자들이 수년 동안 땀과 노력으로 일궈온 사업장이, 몇 달 동안 임대료를 내지 못해 하나둘 스러지는 중이다. 한인 세탁소는 양복을 맡기는 사람들이 없어 개점휴업 상태다. 식당들은 테이크아웃을 통해 버티고 있지만, 제일 싼 런치 박스만 조금 팔릴 뿐이다. 팁으로 먹고사는 웨이터들은 돌아갈 곳이 없다. 코로나 사태는 승자 없는 재난이다.
지난 수주 간, 2천만 명의 미국인이 일자리를 잃었다. 실업률은 20%에 육박한다. 이 수치에는 한 가지가 빠졌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대부분이 자기 노동력을 팔아 월급 받아 가던 서비스직이라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이민자들과 경쟁에서 밀려난 저소득 화이트칼라 계층, 그리고 그들이 모여서 경쟁하는 서비스 업종이 이번 코로나 사태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미국 정부는 그나마 발 빠르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해고된 노동자들을 위한 실업수당 지급도 확대했다. 여기에도 사각이 존재한다. 내 장인어른 같은 경우, 식당에서 배달 일을 한다. 장인어른은 자영업자로 등록되어 있다. 식당에서 고용보험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퇴직수당이 없다.
최근 통과된 법안으로 우버 운전사 등 자영업자들에게도 실업수당 지급범위가 확대되었다. 하지만, 주정부는 아직 이들을 구제할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실업수당 신청을 받아본 적도, 제대로 서류도 구비되지 않은 이들을 한꺼번에 처리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도무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법과 실무 사이에 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갭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다수에 사람들은 당연히 가장 경제적으로 취약한 서비스노동자들이다. 내 장인과 동료들은 몇 달 동안 식당에서 전혀 수입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모아둔 돈이 있는 사람들만 그나마 버티는 중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위험한 곳이든 법의 사각지대든 어디든 일을 찾는 수밖에 없다.
내가 사는 카운티 인구 통계상, 라티노계 인종의 비율은 10%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카운티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 중, 약 절반이 라티노다. 이들 대부분은 이민자들로, 식당, 조경, 건설 같은 일을 해서 돈을 번다. 대면접촉이 불가피한 일들이다. 라티노계에서 확진자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국적으로 보면, 흑인 코로나바이러스 환자들의 사망률은 백인의 두 배다. 내가 사는 워싱턴 DC 사망자의 80%는 흑인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영향은 차별적이다.
갑판위의 사람들
텅텅 빈 맨해튼과 실리콘밸리 인근의 부촌의 풍경이 뉴스 화면에 자주 등장한다. 반면 바닷가에는 물놀이를 즐기는 인파로 북새통이다. 재택근무기간이 길어지면서, 사정 좋은 회사의 근로자들이 노트북을 들고 도시를 떠나 바닷가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대기업들은 앞다투어, 재택근무 연장 계획을 내놓으며 얼마나 직원 복지에 신경 쓰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주식시장 또한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직 변동성은 심하지만, 3월 같은 급락장은 아니다. 이제는 코스트코에서 휴지를 살 수 있다.
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잘 다뤄지지 않는다. 오늘도 어디선가는 폐업을 하고, 누군가는 소득이 없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누군가의 일상은 처절히 파괴되고 있다. 2천만 명의 실업자라는 수치는 너무 추상적이다. 그 수치 안에 포개져 있는 개인의 비극들은 보이지도 와닿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식비와 월세를 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일터로 나아간다. 돈을 벌기위해 카운터에 선 이들은, 역시 돈을 벌기 위해 바닷가가 아닌 도시로 출근하는 고객들과 옥신각신 다툰다. 손님에게 마스크 착용을 요구했다가 맥도날드 직원이 총에 맞았다는 뉴스는, 일선 노동자들이 얼마나 큰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코로나로 모두가 힘들고 불편하다. 다만 좀 더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뉴스에서 잘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이 세상에는 재난지원금으로 한우를 사 먹는 사람뿐만 아니라, 당장 쌀과 라면을 사야 되는 사람도 있다. 표류하는 배에서 가장 위태로운 갑판에 서있는 사람들 말이다. 마침내 인류가 코로나로부터 회복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그 빛을 쬐어야 할 곳도 그들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어디든.
그러나 3월에, 나는 절망했다. 그동안 투자를 야바위 게임쯤으로 생각했다. 동전을 뒤집어서 앞면이 나오면 돈을 벌고, 뒷면이 나오면 돈을 잃는, 확률을 가장한 놀음. 잃을 때도 있지만, 돈을 벌 때 가 더 많았다. 나는 계속해서 돈을 걸었다. 그런데, 이번 3월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뒷면이 나왔다. 뒷면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나올 수 있을지는 몰랐다. 내가 하고 있는 투자라는 게임에 대한 믿음 자체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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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지나자, 마법처럼 다시 앞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확진자와 사망자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주식시장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내가 샀던 종목은 운 좋게도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5월이 되자 주식잔고는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금융시장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사이, 미국에서의 일상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사재기가 극심했던 3월에는, 휴지나 식료품조차 사기가 어려웠었다. 세계 최고의 농업 생산국에서 먹을 걱정을 해야 될 줄은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도 농산물의 산지가격은 떨어졌다. 문제는 육류였다. 가공하고 유통하는 공급망이 코로나로 붕괴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중 마트 매대가 비어갔던 것이다. 지금은 다행히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코로나 이전보다 식료품의 종류는 약간 줄고, 값은 약간은 올랐지만, 당장 고기나 휴지를 못 살 정도는 아니다.
직장인으로서의 나의 삶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 벌써 세 달이 지났고, 앞으로 적어도 세 달은 출근할 일이 없어 보인다. 연말 예정되었던 보너스가 취소되었고, 기존 팀원들이 코로나 관련 프로젝트에 차출되는 바람에 내 업무량은 조금 늘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월급 나오는 직장이 있단 것 자체가 고마울 따름이다. 불평할 수는 없다. 다행히 내가 하는 일은 재택근무 적용이 생각보다 쉬웠고, 적응이 된 이후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가 돌아갔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사무실에 복귀하는 시간은 점점 미뤄지는 것이리라.
가장으로서 나는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평소 같음 사무실에서 딴짓을 하고 있을 월급루팡 타임이, 아이랑 짬을 내서 노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콘퍼런스 콜 도중 직장동료 혹은 고객의 자녀 목소리가 들릴 때가 많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상황인 듯하다.
코로나는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바뀌어 놓었다. 외출을 못해 답답하고,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제한되어 불편하다. 하지만, 불편할 뿐이다. 삶이 망가지진 않았다. 정말로 코로나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분들에게 나의 불편함은 같잖은 푸념일 뿐이다.
아메리칸드림의 앞면, 보이는 것들
유학을 온 이후 미국에 정착한 나에겐, 중국인 장인 장모님이 있다. 두 분은 2000년도 초반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당시 중학생이던 아내는 친척 집에 맡겨두고, 두 분만 먼저 왔다. 돈을 벌기 위해였다.
늦은 나이에 별다른 기술도 없이 온 이민이었다. 두 분은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영어를 그래도 빨리 익힌 장모님은 서빙 일을 했고, 장인어른은 같은 식당에서 배달 일을 했다. 두 분은 그 뒤로도 계속 식당 일을 해오셨다. 두 분의 영어는 그래서 지금도 지나치리라만치 ‘공손’하다.
내세울 것이 근면함밖에 없던 두 이민자는 열심히 일했다. 휴일도 없이, 하루 13시간씩을 밖에서 일했다. 일터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견뎠다. 호소할 데도 없었다. 나이 많은 이민자가 차이나타운을 벗어나서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간에 몇 번 식당을 옮기시긴 했지만, 두 분은 20년 가까이 식당 일을 했다.
두 분의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영주권을 취득했고, 집도 한 채 장만했다. 신분이 안정된 덕에, 중국에 남겨둔 딸 또한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온 내 아내는, 커뮤니티컬리지를 거쳐 번듯한 주립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아내는 지금은 두 분의 연간 소득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연봉을 받는다.
아메리칸드림의 뒷면, 보이지 않는 것들
아메리칸드림. 내 장인 장모님의 삶 그 자체다. 아무런 기술 없이도, 미국에선 누구나 열심히 일한다면 번듯한 삶을 살 수 있다. 반은 맞는 말이다. 맨몸으로 미국에 와서 집도 사고, 딸을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빠진 게 있다. ‘개같이 열심히 일하고 안 써야 된다’는 전제.
두 분은 거의 20년간 매주 90시간이 넘게 일했다. 노동력을 갈아 넣어서, 임금을 늘린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벌은 돈은 악착같이 저축했다. 하루 13시간씩 식당 일을 하고 돌아와, 다음날 도시락까지 쌌다. 아내의 가족이 미국에서 이렇게 터전을 닦을 수 있었던 데에는, 한 세대의 이런 고생과 희생이 있었다.
물론 장인 장모님이 잘 풀린 케이스인 건 맞다. 식당이 잘 될 때, 장모님은 한 달에 5000불 이상을 벌었다.(최고 기록은 월 8천 불). 식당 임금 자체는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팁이 짭잘했다. 장모님은 꽤 요령이 있는 웨이트리스셨던 것 같다. 식당 또한 유명인이 많을 찾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됐기에, 팁도 후하게 받을 수 있었다.
내 장모님처럼,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거나 약간의 기술을 체득할 경우 괜찮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 확실히 미국은 저숙련 블루칼라 노동자도 고임금을 받아 갈 수 있는 곳이다. 대도시의 경우, 서비스직도 시간당 15불 정도 버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이 정도 임금에 1) 노동시간을 정말 갈아 넣고, 2) 비용을 극단적으로 줄일 경우, 어느 정도 저축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미국 임금은 저숙련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유입되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미국으로 건너 간 한인들이 주로 세탁소 나 편의점을 운영한다는 말,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요샌 베이글샵을 운영하는 분들도 많아졌다. 중국 사람들의 주요 사업은 단연 중식당이다. 이들 업종 특성은, 별다른 기술이 없고 영어가 익숙지 않은 이민자들도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내준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더 오래 일하는 자에겐, 소득으로 확실히 되돌아온다. 그들이 이민자든 외계인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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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미 공장의 해외 이전으로, 많은 제조업 일자리가 미국에서 사라졌다. 또한, AI 기술 도입으로 단순 사무직 자리도 계속 줄고 있다. 기술과 사회의 발전이, 이미 평범한 미국인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고 있다. 다만, 주류 언론에서 이들의 삶에 관심이 없을 뿐.
이처럼 경쟁에서 밀려난 노동자들이 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업종은 서비스업이다. 아직 인공지능과 해외 이전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민자들의 일터였던 서비스업에 다른 경쟁자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이들은 대립할 수밖에 없다.
경제가 좋았던 지난 몇 년 동안, 헤어드레서, 바텐더, 식당 서빙, 우버운전사 등의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졌다. 덕분에 미국 실업률은 역대급으로 낮아졌다. 오랫동안 지체되었던 실질임금도, 가장 최근 몇 년 동안은 오르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삶도 나아지는 것만 같았다.
미국의 높은 인건비를 논할 때 주로 언급되는 것은, 이 서비스직 노동자에 대한 임금이다. 특히 배관이나 전기처럼 어느 정도 기술이 요구되는 직업들의 몸값은 매우 비싸다(그래서 미국에서 집을 사면 DIY 기술이 는다). 상대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저소득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월급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교사는 대표적인 박봉 직업이다. 막중한 역할과 책임에 비례하지 않는 월급에 좌절해서, 일을 그만두는 젊은 교사가 부지기수다. 지인 중 한 명은 교직을 때려치우고 공사판으로 옮겨갔다. 당연히 돈은 더 많이 번다.
IT, 금융업 의사 같은 고소득 화이트칼라에 가려져있는 저소득 화이트칼라의 임금은 계속해서 줄고 있다. 화이트칼라 저소득층과 블루칼라 직종 고소득층 간에는 소득 차이가 거의 없거나 역전돼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을 서비스직으로 내미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던 와중에, 코로나가 덮친 것이다.
코로나의 파괴는 차별적이다
식당, 쇼핑몰, 미용샵, 호텔, 관광지가 코로나 사태로 인해 모두 문을 닫았다. 서비스업종 노동자들의 일터가 모두 폐쇄된 것이다. 많은 기업들이 타격을 입었지만, 큰 기업일수록 재택근무에 잘 적응할 여력이 있다. 대기업들이 재택근무로 전환하는 동안,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영업자, 소매점들은 점점 파괴되고 있다. 직장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폐업 사인이 붙은 단골가게들이 늘어나고 있다. 직장인들이 집에서 일하니 별 수가 없다.
이민자들이 수년 동안 땀과 노력으로 일궈온 사업장이, 몇 달 동안 임대료를 내지 못해 하나둘 스러지는 중이다. 한인 세탁소는 양복을 맡기는 사람들이 없어 개점휴업 상태다. 식당들은 테이크아웃을 통해 버티고 있지만, 제일 싼 런치 박스만 조금 팔릴 뿐이다. 팁으로 먹고사는 웨이터들은 돌아갈 곳이 없다. 코로나 사태는 승자 없는 재난이다.
지난 수주 간, 2천만 명의 미국인이 일자리를 잃었다. 실업률은 20%에 육박한다. 이 수치에는 한 가지가 빠졌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대부분이 자기 노동력을 팔아 월급 받아 가던 서비스직이라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이민자들과 경쟁에서 밀려난 저소득 화이트칼라 계층, 그리고 그들이 모여서 경쟁하는 서비스 업종이 이번 코로나 사태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미국 정부는 그나마 발 빠르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해고된 노동자들을 위한 실업수당 지급도 확대했다. 여기에도 사각이 존재한다. 내 장인어른 같은 경우, 식당에서 배달 일을 한다. 장인어른은 자영업자로 등록되어 있다. 식당에서 고용보험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퇴직수당이 없다.
최근 통과된 법안으로 우버 운전사 등 자영업자들에게도 실업수당 지급범위가 확대되었다. 하지만, 주정부는 아직 이들을 구제할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실업수당 신청을 받아본 적도, 제대로 서류도 구비되지 않은 이들을 한꺼번에 처리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도무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법과 실무 사이에 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갭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다수에 사람들은 당연히 가장 경제적으로 취약한 서비스노동자들이다. 내 장인과 동료들은 몇 달 동안 식당에서 전혀 수입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모아둔 돈이 있는 사람들만 그나마 버티는 중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위험한 곳이든 법의 사각지대든 어디든 일을 찾는 수밖에 없다.
내가 사는 카운티 인구 통계상, 라티노계 인종의 비율은 10%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카운티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 중, 약 절반이 라티노다. 이들 대부분은 이민자들로, 식당, 조경, 건설 같은 일을 해서 돈을 번다. 대면접촉이 불가피한 일들이다. 라티노계에서 확진자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국적으로 보면, 흑인 코로나바이러스 환자들의 사망률은 백인의 두 배다. 내가 사는 워싱턴 DC 사망자의 80%는 흑인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영향은 차별적이다.
갑판위의 사람들
텅텅 빈 맨해튼과 실리콘밸리 인근의 부촌의 풍경이 뉴스 화면에 자주 등장한다. 반면 바닷가에는 물놀이를 즐기는 인파로 북새통이다. 재택근무기간이 길어지면서, 사정 좋은 회사의 근로자들이 노트북을 들고 도시를 떠나 바닷가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대기업들은 앞다투어, 재택근무 연장 계획을 내놓으며 얼마나 직원 복지에 신경 쓰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주식시장 또한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직 변동성은 심하지만, 3월 같은 급락장은 아니다. 이제는 코스트코에서 휴지를 살 수 있다.
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잘 다뤄지지 않는다. 오늘도 어디선가는 폐업을 하고, 누군가는 소득이 없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누군가의 일상은 처절히 파괴되고 있다. 2천만 명의 실업자라는 수치는 너무 추상적이다. 그 수치 안에 포개져 있는 개인의 비극들은 보이지도 와닿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식비와 월세를 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일터로 나아간다. 돈을 벌기위해 카운터에 선 이들은, 역시 돈을 벌기 위해 바닷가가 아닌 도시로 출근하는 고객들과 옥신각신 다툰다. 손님에게 마스크 착용을 요구했다가 맥도날드 직원이 총에 맞았다는 뉴스는, 일선 노동자들이 얼마나 큰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코로나로 모두가 힘들고 불편하다. 다만 좀 더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뉴스에서 잘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이 세상에는 재난지원금으로 한우를 사 먹는 사람뿐만 아니라, 당장 쌀과 라면을 사야 되는 사람도 있다. 표류하는 배에서 가장 위태로운 갑판에 서있는 사람들 말이다. 마침내 인류가 코로나로부터 회복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그 빛을 쬐어야 할 곳도 그들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어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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